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/사례 (문단 편집) ==== [[신라]]★ ==== || [[파일:통일 신라 지도.jpg|width=100%]] || || 신라의 영토와 영향권 || ||<-2> '''원인''' || || 전쟁 ||'''__[[후삼국시대|내전]]__'''[br]'''[[후백제|패전해 정복을 겪음]]'''|| || 최악의 지정학적 조건 ||'''[[후백제|너무]] [[고려|강한 이웃들]]'''|| || 내부 혼란 ||'''[[원종 애노의 난|봉기]]'''[br]'''[[김헌창의 난|지배층 쿠데타]]'''|| || 지도층 불안정 ||'''[[효공왕|권력 기반이 취약한 국가원수]]'''[br]'''[[혜공왕|국가]] [[소성왕|원수의]] [[애장왕|잦은]] [[민애왕|교체]]'''[br][[헌덕왕|무능한]] [[진성여왕|지도자]]|| || 국론 불균형 ||'''__[[시중|국론의]] [[상대등|관리]] [[호족(한국사)|실패]]__'''|| || 군사력 불안정 ||극단적인 군축[br]'''__[[대야성 전투#s-3.3|국방력]] [[서라벌 기습|대붕괴]]__'''|| || 내정 문제 ||'''[[녹읍|개혁]] [[9주 5소경|실패]]'''|| || 특정 집단 소외 ||통합적인 지방 관리의 실패|| || 공황 ||'''국가 경제의 파탄'''[* 중앙집권의 약화에 의한 세수 감소 및 국력 약화]|| || 재정 문제 ||국고 고갈|| || 잘못된 경제 개입 ||'''__[[골품제|일부 특권층의 권력·재력 독점]]__'''|| || 인문 환경 문제 ||지배층의 지나친 향락 심취|| || 자연 환경 문제 ||'''[[삼림파괴|장기적인 환경 악화]]'''|| || 재해 ||[[홍수|국가]] [[기근|단위의]] [[소빙하기|자연재해]]|| ||<-2> '''결과''' || || 멸망 ||소요(쿠테타, 분리독립), 국치(고려로 흡수) || [[태종 무열왕]]때 백제를 멸망시키고 [[문무왕]] 때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에 이어 [[나당전쟁]]으로 [[당나라]]까지 격퇴한 뒤 [[한반도]]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한때는 삼국 [[최후의 승자]]가 된 신라였지만, [[멸망]] 과정은 그야말로 모범적인(...) 몰락 과정이었다. 자연재해는 끊임이 없었고, 지방에 [[세금]]을 걷으려니 반란을 일으키는 통에 국고가 얼마나 텅 비었는지 [[원종·애노의 난]]을 시작으로 지방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에서 벗어났다. 이 시기에 발생한 [[신라구]]는 [[일본]]에 들어가 약탈을 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다. 게다가 신라의 리즈 시절에 있었던 숯 제조도 산림 훼손과 참나무류가 감소함에 따른 백성들의 기아를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. 작황이 좋지 않으면 [[도토리]]라도 먹었는데, 숮과 기와를 굽느라 숲을 다 베어버렸기 때문. 또한 [[삼국통일]]의 주역이었던 [[화랑]]들도 이 무렵부터 심하게 [[타락]]하고 말았다. 이렇게 신라는 행정체계까지 제대로 붕괴해 지방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말기에는 수도 [[서라벌]] 말고는 행정력도 미치지 못하는 [[도시국가]] 정도의 상태로까지 쪼그라들어 버렸다.[* 실제로 [[혜공왕]] 이후부터 [[경문왕]] 이전까지는 신라의 왕 계표를 보면 잘 봐줘야 5~10년 간격으로 왕이 휙휙 자주 바뀌어버렸던 것도 잘 알 수 있다. 그 중 몇몇은 [[요절]]한 경우도 있지만, 왕위 쟁탈전과 [[쿠데타]]에 의해 희생된 왕들도 상당히 많다. 그나마 이런 와중에도 [[원성왕]], [[흥덕왕]] 같은 [[명군]]이자 [[성군]]들도 나타나기는 했지만, 문제는 이들도 소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.] [[교과서]]의 [[후삼국시대]] [[지도]]에는 신라가 [[경상도]] 지역 정도는 간수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, 그나마 이것도 후삼국시대 초반부에나 이 정도로 볼 수 있었지 중반부만 가도 [[경상북도]] 북부의 [[아자개]], 서부 [[경상남도]]의 [[왕봉규]] 등은 완전히 따로 놀았고, 결국 후삼국시대 후반부에는 [[경주시]]에서 코 앞이나 다름없는 지금의 [[김해시]], [[부산광역시]], [[울산광역시]] 지역까지 죄다 [[후백제]]와 [[고려]]에 투항했다. 멸망 몇년 전에는 차 타고 경주에서 30분 거리의 [[포항시]]까지 고려 영토가 되었을 정도. [[삼국사기]]에서 멸망 당시 신라 왕실은 경주 지역이나 겨우 다스리고 있다고 말할 정도니 그야말로 천년 전 신라 건국한 초대 [[혁거세 거서간]]과 2대 [[남해 차차웅]], 3대 [[유리 이사금]] 당시 영토로 돌아간 셈이 되었다.[* 신라의 영토 확장은 [[탈해 이사금]] 때 장군 [[거도]]가 [[거칠산국]]과 [[우시산국]]을 복속시킨 것이 처음이였다.] 그 와중에 신라가 [[멸망]]하는 그날까지 [[진골]] 혈통 귀족들의 [[골품제|공고한 권력 독점 구조]]만큼은 따로 깨어지지 않았던 것도 본격적으로 신라를 멸망으로 이끈 여러 요인들 중 하나였다.[* 물론 진골 귀족들은 그 대가를 신라 멸망 후 제대로 치렀다. 골품제라는 절대 깨질 수 없는 벽을 이미 잘 알고 있던 그 아래 [[6두품]]들은 진작에 [[고려]]에 넘어갔다. 결국 결과적으로 진골들은 늦게 편입되었고, 6두품들은 일찍 편입된 것이니 누가 더 우대를 받았는지 알만 하다.] 그리고 후백제의 [[견훤]]은 신라 최후의 보루 [[대야성]]에서 몇 번이나 막혔지만, 기어코 뚫어내고 수도인 금성까지 함락하여 [[포석정]]에서 술판이나 벌이며 놀고 있던[* 실제로는 놀았던 게 아니라 신라를 구해달라고 [[제사]]를 지내고 있다가 당했다는 설도 있다. 경애왕의 구국을 위한 행적 등 여러 정황상 일단 이게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.] [[경애왕]]을 죽이고[* 정확히는 [[자살]]을 강요하였다.] 왕후를 [[겁탈]]했다. 견훤이 주인이고 신라가 [[빵셔틀]]이라 한 근거는 견훤이 자기 마음대로 경애왕을 죽이고 [[경순왕]]을 옹립했기 때문이다. [[동아시아]] 역사상 개인이 일국의 국왕을 갈아치운 역사는 그리 많지 않으니 그만큼 굴욕이 크다. 그나마 천년 왕조의 정통성만큼은 고려했는지[* 사실 그런 이유도 있고, [[공산 전투]]를 실행하기 위해 일부러 살려둔 것도 있다. 만일 왕건이 신라의 구원군을 보내기 전이나 구원군이 오는 도중에 숨통을 끊어버렸으면 고려군은 말머리를 [[완산주]]로 돌려 공격해왔을 것이니 고려를 멸망시키기 전까지 적당히 살려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.] 견훤은 완전히 신라 체제의 마지막 숨통까지 끊지는 않았고 새로이 [[경순왕]]을 옹립한 후[* 이것 때문에 견훤은 [[동탁]]에 빗대어 비판을 받았다. 동탁이 힘으로 [[후소제(후한)|소제]]를 폐위하고 [[헌제]]를 세운 것과 비슷한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.] 반속국 정도로 남겼는데, 결국 [[고창 전투]]와 견훤의 실각 이후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이 고려에 자발적 귀순하는 형태로 평화적으로 멸망할 수는 있었다.[* 이것이 [[고려]] 입장에서도 다행이었는데, 고려도 [[후백제]]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한반도 호족들 사이에서 상징성이 크던 천년 신라 왕실을 선뜻 군사적으로 멸망시키기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. 이렇게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면서 신라 왕가와 주요 귀족 가문들은 고려 초기 혼란기를 거친 후 고려의 지배 계층으로 편입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